"잠시 기억을 더듬어본다."
분명 옛 서울역 1층 중앙홀 입구 안쪽엔
공중전화기가 있었다. 그리고 중앙홀 너머로 곧장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던 것 같다. 새마을호가 가장 빨리 달리는 열차였던 시절. 역 앞 광장엔 비둘기들이 잔뜩 모여앉아 행인을 유혹했었던, 옛 서울역에 대한 마지막 기억들. 퍼즐조각 맞추듯 기억을 조립하려 애썼지만, 희미해지고 있다는 사실만 재확인했다. 그리고 무척 오랜만에 다시 옛 서울역 1층 중앙홀로 들어섰다.

근대 패션의 리더, 신여성



첫 느낌은 낯설었다.
공중전화기도,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도, 표를 들고서 열차 시간을 확인하던 여행객도, 휴가 나온 장병도 없었다. 대신 중앙홀 한가운데 천장에 매달려있는, 흡사 샹들리에처럼 느껴졌던 크리스탈 설치 작품과 높이 솟아오른 기둥들이 손님을 반겼다.

보통 옛집을 다시 찾으면 전보다 작아진 느낌을 받곤 하는데,
'문화역서울 284'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불리는 옛 서울역은 오히려 예전보다 더 웅장하게 다가왔다. 천장이 저렇게 높았던가. 어쩌면 조명 탓일런지도 모르겠지만, 1925년 건립 당시의 모습을 최대한 살려 복원했다는 옛 서울역은
세월의 무게만큼이나 장중한 분위기였다.


이렇듯 잠시나마 공간을 음미하고 나서야
중앙홀 끝, 공중에 매달려있던 두루마기가 눈에 들어왔다. 10월 21일 금요일 늦은 오후에 열릴 '2011 한복 페스티벌 - 한복, 근대를 거닐다' 패션쇼를 위해 임시로 설치된 것인데, 패션쇼 예술감독을 맡은 스타일리스트 서영희 씨의 감각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두루마기 위로 이렇듯
수채화처럼 예쁜 영상이 드리울 줄은
미처 몰랐으니까. 1920년대의 서울역, 그리고 그 앞에 다소곳이 서있는 모던걸의 모습. 이날 패션쇼의 주제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서서히 해가 저물고
옛 서울역이 은은하게 빛을 내뿜기 시작하자


드디어 1층 중앙홀 한가운데서 패션쇼가 시작되었다.
총 6명의 한복 디자이너가 각기 서로 다른 소주제로 작품을 선보였는데, 가장 먼저 런웨이를 장식한 의상은 디자이너 이현경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의 혼례복'이었다.

주지하다시피 덕혜옹주의 삶은 비극적이었다.


고종의 고명딸로 태어나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지만,
고종이 승하한 이후 덕혜옹주는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일본으로 건너가야 했다. 이후 일본의 감시 아래 성장한 덕혜옹주는 일본인과 혼인했지만, 이후 병마와 싸우게 된다. 알려진 병명은 정신분열증이었다. 정신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던 덕혜옹주는 일본인 남편과 이혼했고, 얼마 있지 않아 외동딸마저 실종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1962년에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귀국 이후의 삶 역시 순탄치 않았던 덕혜옹주.

디자이너 이현경은 고종의 마음을 헤아리며
덕혜옹주를 위한 혼례복을 만들었다고 한다. 여인에게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결혼이라는 의식, 그리고 마지막 황녀인 덕혜옹주를 일본에 빼앗기지 않으려 노력했던 고종의 마음을 담아낸 혼례복은 여인의 꿈과 우리 민족의 미래를 동시에 담아낸 작품이었다.


덕혜옹주 혼례복으로 시작한 패션쇼는
'궁중 여인들의 서울역 나들이'로 이어졌다.

1910년 8월 29일, 역사 속으로 사라진 대한제국의 여인들.
만약 일제에 의한 식민통치가 아니었다면,
고스란히 근대라는 시대를 거닐었을 그녀들을 상상한
디자이너 류정민의 의상이다.



궁중 여인이라는 화려한 겉모습.
하지만 한편으로는 고독한 삶을 살았을 그녀들의 모습을
황금색과 검정색의 대비로 표현했다.


서울역이 건립된 1920년대 중반은
한복과 양장이 뒤섞여 거리를 거닐고, 또한 개량 한복이 등장했던 시기였다. 디자이너 류정민은 그 당시 과도기적 복식 구조를 '타이트하게 처리한 근대적 실루엣 속에 한복의 고운 결을 담아낸 의상'으로 표현했다.

더불어 20년대 이후 우리 여인들의 필수 패션 아이템이었던
양산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요소.


대한제국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분명 근대 패션의 트렌드를 주도했을 궁중 여인들의 모습.
웬지 상상만으로도 입가에 미소가 머문다.

덕혜옹주에서부터 궁중 여인에 이르기까지
대한제국에 대한 오마주로 문을 연 패션쇼는 곧이어
디자이너 조진주의 모던걸에 대한 재조명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짧게 잘라낸 머리.
그리고 기다란 장옷을 벗어던진 모던걸.
특히 발목이 드러나는 한복 치마가 돋보인다.

근대 패션의 리더였던 그녀들은 이처럼
한복의 부분적 변형을 통해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


30년대로 들어서면 당대의 패셔니스타였던 무용가 최승희를 만나게 된다.
디자이너 박선옥은 최승희의 무용복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을 선보였는데, 한복의 선을 살리면서도 과감하게 변형된 실루엣과 소재의 사용으로 근대적이면서도 미래지향적인 향기를 듬뿍 불어넣었다.


저고리의 형태적 변화와 깊이감 있게 빛이 묻어나는 치마,
그리고 모던한 실루엣은 최승희의 역동적인 면모가 살아숨쉬는 듯했는데―


디자이너 김진선에 이르면
동양과 서양의 만남, 그리고 고전미와 현대적인 색채가 어우러지며 모던걸의 숨결이 생생하게 전해진다. 체크무늬를 덧입은 울 소재의 한복 저고리에선
익숙한 듯하면서도 우리만의 개성이 느껴지기도.



다채롭게 꾸며진 패션쇼의 마지막 무대는
근대의 패션리더 '1920년대 여학생'의 복고였다. 디자이너 김영진은 '결코 행복하거나 화려한 시절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낭만을 갈구했을' 그녀들의 아름다운 희망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했는데, 노란색 양산을 받쳐든 당시 여학생의 꿈이 '흰색 한복 혼례복을 입고 부케를 든 여인의 모습'으로 잘 드러나고 있다.

10월 21일 금요일. 옛 서울역에서 펼쳐진 패션쇼는 이처럼
대략 1세기 전 '시대의 변화를 마음에 품고 꿈과 희망을 옷으로 표현했던 신여성들의 패션과 그녀들의 내면'을 살펴볼 기회가 된 행사였는데,


패션쇼를 마치고 나와 옛 서울역을 다시금 바라보니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땅의 의미와 가치가
새삼 마음 깊이 와닿기도 했다. 그리고 아울러
   새단장을 마친 옛 서울역이 활력을 되찾았으면 하고 소망해 본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래 추천 버튼도 꾸욱 눌러주시고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1. *저녁노을* 2011.10.23 10:53 신고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 댓글

    우아해 보입니다.ㅎㅎ

    편안한 휴일되세요

  2. 굴뚝 토끼 2011.10.23 11:01 신고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 댓글

    역시 이야기가 담겨진 것들은 그 의미가 더 강하게 다가오는 듯 합니다.
    멋진 글입니다.^^

  3. 핑구야 날자 2011.10.24 00:21 신고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 댓글

    역시 한국의 색감이 최고 인듯해요,,, 좀더 세계화가 될 수 있도록 활동영역이 넓어졌으면 좋겠어요

  4. PinkWink 2011.10.24 08:34 신고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 댓글

    멋있네요... 음... 타이트함이 좀... 노총각눈을 유혹하긴 하지만^^
    축축한 아침이에요.. 좋은 하루되세요^^

  5. palm kernel seed 2011.11.14 11:43 신고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 댓글

    와! 장윤주씨 정말 팬인데 ㅠㅠ
    런웨이뿐만아니라 스트릿에서도 빛이나네요~!
    오히려 인간미넘치는 스트릿이 더욱 빛이나는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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