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친구의 성화에 못이겨"
지난 주말, 다시 찾아간 동대문 역사문화공원 디자인 갤러리. 얼마 전 소개한 '신당 생활사 박물관 전시'를 꼭 한번 보고 싶다던 친구에게 나는, 그럼 가서 보라고 일러줬지만 같이 갈 사람이 없다는 통에 마지못해 동행했다. 그런데 둘러보고 나오려던 중 웬지 모를 아쉬움이 밀려들었다. 전시 종료를 10여 일 앞둔 탓만은 아니었다. 지갑을 놓고 외출한 사람처럼, 혹은 길바닥에 열쇠를 흘린 것처럼 찜찜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분명 뭔가 놓친 게 있다는 생각이 들 즈음 그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변신



처음 이곳에 들렀을 때는 그다지 눈길을 주지 않았던 작품이다.
흔히 볼 수 있는 재래시장의 풍경 중 하나. 그래서 좀더 가까이, 몇 발짝 더 다가가서 살필 생각을 하진 않았었다.


공사장 인근의 오래된 널판때기마냥,
또는 재개발을 앞둔 주택가 모퉁이를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 같았던 이 작품도 마찬가지.
신당동 어느 주택가를 그렸구나, 하고 돌아서려던 찰나―.


주택가 골목의 포장도로에 잠깐 시선이 머물렀다.
한 발짝, 한 발짝 다가설 때마다 선명해지는 옷주름과 터진 실밥.
그리고 바늘땀 자국.


단추와 청바지 주머니, 벨트 고리와 옷솔기 및
어지럽게 늘여놓은 실 부스러기 등등이 한눈에 들어왔다.


현관과 창문, 집벽과 도시가스 배관 등등
그림에 쓰인 재료가 대부분 청바지라는 걸 눈치챈 건 그때였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주소 서울 중구 을지로7가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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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처음 이곳에 들렀을 때부터 '그림의 정체'가 수상하긴 했었다. 장판가방, 음료수병 컵, 빨간 대야 테이블, 횟감뜨기 기술을 응용한 앞치마 및 수세미 조끼 등 일상 생활의 흔한 소품을 응용한 다른 전시 작품과는 웬지 구색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터다. 그래서 뜬금없이 그림 두 점이 여기 왜 있을까, 라는 식의 찜찜한 기분이 들기도 했었다.


하지만 알고보니 그림의 정체는 낡고 닳아 더이상 입지 않는 청바지 너머로
도시 한쪽의 쓸쓸하고 외로운 정경을 담아낸 작품이었다. 여러 전선이 뒤엉킨 하늘은 신발끈을 활용한 듯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마치 거미줄에 걸린 벌레마냥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는 도시인의 내면을 그린 것처럼 느껴지기도.


물론 그림의 재료로서 청바지는 더이상 새로운 게 아니다.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2억원에 가까운 가격에 낙찰된 최소영 작가의 청바지 그림 '광안대교'는 몇 해 전 언론을 떠들썩하게 만들기도 했었고, 청바지를 응용한 다채로운 설치 작품전이 열린 적도 더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눈길을 끈 이유는 청바지의 터진 실밥과 뒤엉킨 실 부스러기 너머로 소시민의 고단한 삶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신당동 중앙시장의 한 풍경을 청바지로 표현한 이 작품도 마찬가지.
축산물과 수산물, 농산물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모습에서 출퇴근길 지하철 공간이 문득 떠오르기도 했었다. 어쩌면 이 역시 그림의 재료가 일상에서 흔히 입는, 우리네 삶의 한 단면이 남몰래 스며든 청바지인 탓일지도 모른다.


작품을 제작한 추영애 작가는 실제로 신당동 시장 한쪽에 작업실을 두고 있다.
재래시장에서 시장 상인들과 어울리며 작업한 덕분인지 그림은 풍경을 그렸다기보다는 풍경 너머의 내면을 담아낸 것처럼 다가온다. 낡은 청바지의 결과 올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이유도 이 때문이지 않을까.


심지어 작품 아래 제멋대로 쌓아올린 헌옷마저 적나라하다.
이를테면―
   도시라는 공간에 겹겹이 쌓여있는 우리의 삶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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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광제(파르르)  2012.02.21 08:47 신고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 댓글

    아무나 찾아낼수 없는 시선이기도 합니다...
    청바지의 변신도 그렇지만...레인님도 대단하십니다...

  2. 공군 공감 2012.02.21 08:54 신고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 댓글

    오!!! 처음 사진보곤 전혀 예측하지 못했었어요
    저런 디테일이 살아있다니..
    작가가 정말 대단합니다.

  3. 초록누리 2012.02.21 09:10 신고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 댓글

    처음 작품을 보면서는 징그러워 살짝 눈이 돌아갈 뻔했는데,
    청바지가 작품으로 변신하는 모습에서 다시금 작가의 작품세계를 읽어내리게 하네요.
    찌그러지고 고단한 도시인의 자화상처럼 말이죠.

  4. 영국품절녀 2012.02.21 09:31 신고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 댓글

    청바지로 만든 작품..
    아이디어가 빛납니다. ㅎㅎ
    잘 보고 갑니다. ^^

    • 하얀 비 2012.02.21 09:44 신고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청바지 그림이라는 분야는 우리나라가 개척한 걸로 특히 유명하다고 해요. 그 분야의 폭이 더욱 넓어졌으면 합니다.

  5. 푸샵 2012.02.21 10:08 신고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 댓글

    신기하네요.......청바지로 만든 그림이라니....
    첨엔 언뜻 사진인 줄 알았아요. ^^
    건강하고, 행복한 화요일 되세요. (⌒▽⌒)

  6. 영심이~* 2012.02.21 10:26 신고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 댓글

    그림인 줄 알았어요...
    너무 멋진데요..?^^

    • 하얀 비 2012.02.21 20:00 신고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저도 처음엔 그랬답니다.
      청바지가 지닌 다양한 느낌을 도시의 한 단면으로, 재래시장의 한 풍경으로 표현한 점에서 작가의 시선과 마음도 느낄 수 있었답니다.

  7. 누리나래 2012.02.21 10:55 신고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 댓글

    저도 처음에는 그림으로 착각했습니다 독특한 감각이 돋보입니다..^^

  8. 아딸라 2012.02.21 11:53 신고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 댓글

    직물이 주는 편안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손을 대도 차갑지 않을 것 같은 느낌요 -
    실밥들이 자연스러운 디테일을 살려주는 것 같네요 -

  9. 핑구야 날자 2012.02.21 12:11 신고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 댓글

    재활용을 통한 패션이 너무 독특합니다. 예술은 가끔 죽어있는 감성을 깨웁니다.

  10. Yujin Hwang 2012.02.21 15:03 신고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 댓글

    낡은 청바지로 예술옷을 만들었나...하고 와봤더니...ㅎㅎ
    청바지 작품 깜짝 놀랬어요. 말이 되는 낡음의 미학과 예술입니다.

  11. 마속 2012.02.21 19:30 신고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 댓글

    헛... 청바지로 이런 예술작품을 만들어 내다니 대단한데요. :)

  12. 공군 공감 2012.02.22 10:01 신고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 댓글

    아, 진짜 사진인 줄 알았는데 청바지라니....
    실제로 직접 한 번 가서 보고 싶은 작품입니다!

  13. 오를르 2012.02.22 10:17 신고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 댓글

    굉장합니다. 이 전시회 꼭 보고 싶네요! ^^ 불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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