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둡고 폐쇄적인 승부욕!"
미소와 눈짓, 손끝 너머로 가늘고 긴 검을 숨긴 여인들의 런웨이. 표정은 마치 사브르 마스크를 쓴 듯 은밀하게, 또 깊은 두려움을 들키지 않으려는 듯 견고하게. 그리고 품위와 권위를 잃지 않으려는 듯 목에 잔뜩 힘을 준 그녀들의 척추는 꼿꼿하기만 하다. 18세기 프랑스 어느 귀족의 로코코 정원. 그렇게 그들은 외로운 검투를 벌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족으로서의 애티튜드만큼은 잃지 않는다. 그것은 존재의 이유니까. 그런 점에서 펜싱은 그들에게 있어 스트레스를 우아하게 해소하는 한 방법이었다.

2012-13 FW Seoul Fashion Week - Leyii Collection



프로젝트 런웨이 코리아를 통해 이름과 얼굴을 널리 알렸던 디자이너 이승희의 2012-2013 F/W  서울패션위크 '르이' (Seoul Fashion Week - Leyii Collection) 컬렉션. 2012 S/S 시즌, 몸의 곡선이 자아내는 그림자를 통해 여인의 숨쉬는 감성을 런웨이에 올렸던 그녀가 이번엔 고급스러운 텍스쳐와 날렵한 드레이핑, 그리고 아찔한 테일러링으로 18세기 프랑스 귀족들의 독주를 추적했다. 화려한 겉모습도, 사치스러운 사생활의 외양이 아닌, 펜싱 경기를 즐기는 귀족 여성들의 날카롭지만 외로운 내면이 포커스.


캣워크의 블랙은 외롭게 질주하는 투기어린 여인의 뒷모습을 닮았다. 펜싱과 귀족 여성들의 가려진 승부욕을 모티브로 하면서도 블랙을 컬렉션의 메인 컬러로 사용한 이유는 여기에 있지 않을까.

귀족들의 사치와 과시욕이 절정에 달했던 18세기 프랑스. 오늘날 스포츠로서 펜싱의 탄생에 큰 기여를 했던 그 시절, 귀족들은 펜싱을 교양 과목이자 생활양식의 하나로 채택했다. 덕분에 몸선은 격조를 살려냈고, 검끝은 엘레강스했으며, 두 다리와 발은 기품이 묻어났다. 동작은 마음을 다스렸고, 마음은 다시 몸을 제어했다. 탐욕으로 가득하지만 눈빛만큼은 절제를 미덕으로 삼았고, 질투심이 넘쳐나도 손끝은 우아해야 했다.

 
흔들리지 않는 베르사이유의 장미마냥 단단한 시멘트로 마음을 포장하고 높이 치솟은 머리장식과 드레스의 과장된 실루엣으로 삶을 표현해야 했던 그들의 유일한 탈출구는 어쩌면 펜싱의 마스크였을지도 모른다.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는 콧볼의 떨림만큼은 적어도 그 속에선 자유로웠을 것이다. 블랙은 어둠의 마스크 건너편에 가려진 폐쇄적인 승부욕과 투기를 그렇게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컬렉션은 깊은 우물을 들여다보듯 그 마음 속을 파고든다.


그래서인지 런웨이는 고급스러운 터치 아래로 긴장감이 흘렀다.

몸을 편하게 휘감지만 쳐지지 않고 탄탄한 저지 드레스, 그야말로 걸쳤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가벼운 무게감의 울 베스트, 날렵하지만 부드러운 캐시미어 아우터에 이르기까지 디자이너 이승희의 블랙은 깊이감이 있으면서도 무겁지 않았고, 차분함 속에 긴장감이 아롱거렸다. 이는 소재를 선택하는 안목이 탁월하기로 유명한 그녀의 장점이 돋보이는 지점이자, 컬렉션의 테마에 힘을 불어넣은 장치 중 하나였다. 위태로운 내면과 견고한 외면이 만나 화려하게 비상했던 18세기 프랑스의 로열패밀리처럼.


아우터와 이너웨어의 절묘한 균형감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지퍼 장치로 재킷과 볼레로를 교묘하게 넘나드는 외투와 목에서 다리까지 몸을 휘돌아감는 날렵한 드레스, 아슬해도 안정감을 잃지 않는 시스루 드레스와 가죽의 앙상블 등 각각의 아이템은 음극과 양극처럼 서로의 에너지를 사이좋게 주고받았다.


메인 컬러인 블랙을 서포트하는 화이트 룩에도 이승희만의 균형감각은 돋보였다. 가죽과 울, 저지와 실크, 캐시미어 및 코튼을 하나의 룩에 버무리면서도 외줄타기를 하는 놀이꾼 못지 않게 아슬아슬하게 무게 중심을 잡아내는 실력에선 감탄이 절로 나왔을 정도. 그러면서도 깔끔함을 잃지 않는 면모는 2009년, 디자이너 자신이 론칭한 '르이'만의 개성이다.


<Beautiful play in Darkness>

컬렉션의 콘셉트를 명약관화하게 드러내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그 속에 녹여낸 탁월함은 2012-13 F/W 서울패션위크에서 이목을 집중시켰던 디자이너 이승희의 저력을 잘 보여준다. 시종일관 이어졌던 블랙, 그리고 이와 대비되는 화이트 및 안개처럼 스며든 그레이 등 절제된 컬러와 주제의 심연에도 불구하고 컬렉션이 흥미진진했던 까닭은 이 때문이다. 그녀는 깊이감이 얼마나 역동적으로 재탄생할 수 있는지 옷으로 증명했다.


승부욕에 매몰된 팜므파탈들의 런웨이는 덕분에 흡사 쟝 앙트완느 와토의 그림을 마주하듯 미학으로 승화되었다. 이를테면 무서운 여자들의 내면 풍경이자 욕망의 현상이랄까. 아울러 넘치다못해 바닥에 끌리는 스커트 자락 위로 보호구인양 걸친 구조적인 맥시 코트나, 탄탄한 저지스커트 위로 덧입은 크롭 패딩처럼 '르이 컬렉션'은 패션을 통해 시대의 이야기를 전하면서도 그 풍경을 웨어러블하게 그려넣는 덕목마저 놓치지 않았으니―

   디자이너의 앞으로의 질주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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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일상의 디자인 2012.04.25 09:22 신고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 댓글

    몸을 타고 흐르는 실루엣이 참 우아하네요~ 우아한 블랙..시크합니다!ㅎㅎ^^

  2. 핑구야 날자 2012.04.25 12:11 신고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 댓글

    블랙 OR 화이트... 마이클잭슨의 노래가 생각나네요.. 검은색은 저승사자 같아요...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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