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묘앞에 가면"
만원에 청바지 열 장을 살 수 있고, 반세기 가까운 세월의 공명을 간직한 아파트도 만날 수 있으며, 3500원으로 머리를 단정히 매만질 수 있다. 지근거리에 위치한 창신동은 드라마 <시크릿 가든>과 <패션왕> 촬영장소로 유명하다. 하지원의 집과 유아인의 사무실이 그곳에 있다. 수많은 봉제공장을 지나 언덕 쪽으로 좀더 올라가면 그 유명한 돌산과 만나게 되니 근대 서울의 옛 정취에 흠뻑 취하게 된다. 일요일에 열리는 벼룩시장은 동대문 상권을 일으킨 원조 상인들의 동문회다.

수십여 년 전 동대문에서 옷장사하던 분들의 옛이야기는 서비스.

컷트 가격이 3500원?


그 중에서도 '연예인 아파트'로 불렸던 동대문아파트는 동묘앞의 상징이자 중심이 되는 건물. 좁고 긴 중앙광장을 사면으로 에워싸며 하늘로 올라가는 이 아파트는 어린시절 성냥개비로 건물쌓기 놀이하던 그 시절과 홍콩 느와르 영화를 추억하게 한다.

도로변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아파트 중앙광장에 들어서면 동굴 속으로 숨어든 듯 고즈넉하다는 점도 동대문아파트의 오늘이 지닌 매력이다.

뻥 뚫린 중앙광장 사이를 장식하는 빨래건조대는 동대문아파트의 아이덴티티. 주인이 서로 다른 세탁물임에도 행과 열을 맞춰 가지런히 도열한 풍경은 정겹기까지 하다. 양쪽 복도 난간을 도르래로 연결해 줄을 잡아당기며 빨래를 너는 재미 또한 분명 있을 듯.

바로 이 동대문아파트의 대각선 지점에 3500원 이발관이 있다.

지하철 동묘앞역 1번 출구로 나와 지인과의 약속 장소로 향하던 중 길을 찾지 못해 두리번거리다가 우연히 발견한 앙증맞은 입간판에 그만 발걸음을 딱 멈추고 말았는데, 이발 가격이 3500원? 설마 싶었다. 요즘 '대형 상인'을 중심으로 크게 유행하는 상술, 일명 '미끼 상품'이 아닐까 의심했던 것이 사실. 또 한편 과연 실제로 영업 중인 헤어숍인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그런 전차로 무턱대고 들어갔다.

궁금해서, 혹은 나처럼 슬쩍 엿보는 사람이 많아서일까.

"이용사 자격증도 저기 있어."

사진 촬영에 대한 오너의 허락을 구하자마자 소파에 앉아 계시던 어느 어르신이 대뜸 건넨 말. 남성 컷트 한 번에 3만원을 훌쩍 뛰어넘는 몇몇 청담동 헤어숍 가격의 근 10분의 1. 싼 가격 탓에 실력을 의심하는 이들이 더러 있었던 모양이다.

텔레비전 앞에 놓인 같은 기종의 타이머 네 개는 염색 시간 체크용. 역시 소파에 앉아 계시던 어르신이 알려주셨다. 처음엔 단골 손님이려니 했었는데, 이발관의 오너와 생김생김이 닮은 듯하여 여쭤보니 '아버님'이시라고.

어르신 손님은 아버지가, 젊은 손님은 아들이 이발과 염색을 담당한다. 손님이 많이 몰리는 점심시간 전후엔 이렇게 연령대를 구분하여 체계적으로 손님을 맞이하는 시스템이다. 정작 부러웠던 것은 바로 이 점. 부자(父子)가 함께 같은 공간에서 서로 의지하며, 또 수많은 대화를 나누며 늘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 살갑게 다가왔다.

"3500원 이발관이 다른 곳에도 있나요?"

종로 낙원동 및 탑골공원 주변 이발관거리에 30여 곳이 성업 중이라 한다. 이를테면 일종의 틈새시장을 노린 벤치마킹이다. 동묘앞 벼룩시장 및 구제거리는 평일과 주말을 막론하고 어르신들이 즐겨찾는 장소 중 하나다. 또한 인근 벼룩시장 및 봉제공장 상인과 손님들도 수요층에 해당한다. 동묘앞 및 창신동 주변에 3500원 이발관은 이곳뿐이라 점심시간을 중심으로 손님들이 줄서기를 한다고.

고객 연령층은 고르게 분포되어 있는 편. 어르신 손님만이 아니라 젊은이들도 많이들 찾아온다. 처음 온 손님들은 반신반의하지만 가격이 싸다고 해서 실력마저 싼 것은 아니라며 경력 많은 이용사는 힘주어 덧붙였는데―

옛 정취를 간직한 동대문아파트. 그리고 옛날 가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이발관.
변화의 속도가 가파른 오늘날, 이 두 곳은 이처럼
   느림과 멈춤의 미학을 여전히 간직한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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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ottonstick 2012.05.23 12:38 신고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 댓글

    좋네요. 사진 자체도 느낌도 괜찮구요. 특히 동대문 아파트는 서울이 아닌 이국색을 풍기네요 잘보았습니다 ^^

  2. 롤패 2012.05.23 14:11 신고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 댓글

    옛 추억을 되새기는 흑백 사진 설정이 돋보입니다.
    감성이 묻어나는 글입니다. ^^*

  3. 2012.05.23 15:11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 댓글

    비밀댓글입니다

  4. 돌이아빠 2012.05.23 21:28 신고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 댓글

    아파트 정말 이색적입니다.
    홍콩 느와르 영화에서나 보던 그런 장면이 한국에서 그것도 서울 한복판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니.
    덕분에 좋은 구경 했습니다.

    3,500원 이발관, 가격이 3,500원이라는 점 말고라도 정말 오랫만에 이발관 구경해 보네요.

  5. 모모군(베코) 2012.05.24 03:02 신고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 댓글

    이 아파트 언젠가 영화에서 나온적 있었는데.. 기억이 가물가물 하네요.. ㅠ

  6. 핑구야 날자 2012.05.24 12:22 신고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 댓글

    예전 추억이 되살아나네요..

  7. 아련하게 2012.05.25 08:48 신고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 댓글

    자꾸만 높아져가는 서울에도 이런 숨어있는 보물이 있을줄이야.
    아파트 광풍때문에 추억이 깃든 고향 산동네도 산의 반절이 깎여서 들어선 아파트를 볼때마다 가슴아픈데..
    재개발도 좋지만, 오래된 곳을 리모델링해서 계속해서 보존하면 어떨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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