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처음으로 엄마의 단아한 원피스를 슬쩍 입어보는 소녀, 설레는 맘으로 아빠의 번들거리는 구두에 발을 쏘옥 집어넣는 소년. 패션에 눈뜨던 순간의 격정적인 장면들을 잠깐 떠올려본다. 인형에 입힐 옷이 필요하다며 소란피우다 엄마가 아끼던 스커트를 휴지조각으로 만들었던 어린시절의 풋풋함도 스쳐지나간다. 초등학교 6학년 여름 무렵엔 삼촌의 긴팔 셔츠를 반팔로 만들어 걸치듯 입어보기도 했었고, 심지어 삼촌의 새까만 군화를 몰래 신고 돌아다니다 발 곳곳의 피부가 벗겨지고 물집이 돋아 한동안 고생한 적도 있었다. 어쩌면 일종의 '세상이 주는 흥미진진한 선물'과도 같았던 순간들.


2014 s/s SEOUL FASHION WEEK-Kumann YOO HYE JIN Collection



마치 바닷물 속에서 밤하늘을 바라보듯 웨이에 영겁같이 쏟아지던 빛줄기는 뜬금없이 유년시절 기억의 파편들을 사탕 깨무는 것마냥 톡톡 건드렸다. 쇼를 앞두고 늘상 그러했듯 가팔라지던 맥박은 덕분에 꽤나 고요해지며 잔잔한 시선으로 무대를 바라보게 했는데, 혹 이같은 마음 역시 디자이너가 의도한 바였을지도 모르겠다.



선선한 공기가 발걸음을 가볍게 했던 지난 10월 20일 일요일 오후 여의도 공원 문화의 마당. 10월 18일 금요일부터 전개된 2014 S/S 서울패션위크 셋째날, <쿠만 유혜진 2014 S/S 컬렉션>은 가을풍경을 벗삼아 도서관 창가에서 책장을 넘기는 것만 같은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막을 올렸다.

  

컷글라스에 투영된 굴절된 선과 면, 그리고 물결처럼 일렁이는 빛의 파장과 이어지듯 끊어지며 변주하는 색의 흐름. 2014년 봄/여름 <쿠만 유혜진>의 콘셉트이자 영감의 원천은 '컷글라스(칼로 여러 모양을 표면에 새긴 유리그릇)'다. 


반찬을 얹기도 하고 오렌지주스를 담는 컵으로도 사용하며 방울토마토를 쌓아놓기도 하는 친숙한 유리그릇인데, 디자이너는 바로 그 컷글라스를 통해 본, 한편으론 낯설게 다가오는 세계(Concept : Cut-glass-scope)를 패션으로 표현했다. 


컬렉션의 콘셉트를 유년시절에 한번쯤 겪어봤을 법한 경험으로 쉽게 풀이하자면, 밥 먹다 말고 숟가락에 비친 자신의 색다른 모습에 영감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 굴절된 자신의 머리카락, 눈썹, 눈, 코, 입, 얼굴형, 표정의 변화를 찬찬히― 또한 흥미롭게 살펴보게 하는 숟가락처럼 컷글라스 역시 투영된 사물의 범주를 그 잔상에 이르기까지 세세히 들여다보게 한다. 


비록 기억할 순 없지만, 갓 태어나 세상을 마주할 때의 기분도 이와 같지 않았을까. 

굴절되어 새롭게 다가오는 사물의 형태를, 심지어 특정한 화각의 범위 속에서 관찰하는 것은 분명 흥미진진한 경험이다. 몰래 엄마옷을 걸쳐보는 소녀와 아빠 구두에 발을 쏘옥 집어넣는 소년의 그 짜릿한 떨림처럼.


그럼 과연 디자이너는 이를 어떻게 패션으로 표현했을지 궁금해지기도 하는데, 유혜진 디자이너의 2014 S/S 컬렉션(Kumann YOO HYE JIN 2014 S/S Collection) 속으로 한번 쏘옥 유영해보자.


2014 S/S 쿠만 유혜진 컬렉션 - 세상이 주는 흥미진진한 선물


김밥 말듯 옷감을 말아올리다 앞면이 좌우로 커튼처럼 드리워지는 쌀알 색상의 케이프숄더, 꽃봉오리마냥 어깨를 덮으면서도 날카롭게 팔을 감싸는 덜 익은 바나나껍질 색의 부풀린 소매, 등에서 어깨를 지나 팔을 거쳐 허리로 이어지는 듯하더니 다시 뒤돌아 몸을 휘감는 테일러링이 감탄을 자아내는 연한 시멘트 반죽 색상의 집업 재킷. 그리고―


칼라와 라펠·페플럼을 물결처럼 이어 코르셋과 라이더 재킷을 하나로 합친 느낌의 빛나는 은색 상의에 이르기까지 2014 S/S 서울패션위크에서 선보인 디자이너 유혜진의 옷은 옷감의 굴절과 왜곡이 자아내는 아름다움이 그 무엇보다 돋보였다. 

 

컷글라스를 들고 '면과 선'을 360도로 돌리며 그 굴절되는 모습을 살펴보는 듯한 이러한 입체감은 디자이너 유혜진의 시그너처랄 수 있는 '종이접기 같은 조형미의 러플'과 만나 독창적인 테일러링으로 승화되었다. 덕분에 컬렉션은 단아하면서도 역동적인, 서로 상반된 여성미가 균형감있게 다가온다. 이를테면 마치 우아한 와인잔을 들고 왈츠를 추는 것만 같은 분위기가 면과 선을 타고 흐르는 느낌이다.


왜곡과 굴절의 조화를 통해 상반된 요소의 균형을 꾀하는 것. 이는 곧 컷글라스를 통해 발견하고자 했던 2014 S/S 쿠만 유혜진 컬렉션의 테마가 아닐까.



폭과 길이가 서로 다른 면의 분할과 조합이 미니멀하게 표현된, 미니스커트 위에 테일러드 재킷을 걸친 것 같지만 알고보면  위아래가 지퍼로 연결된 블랙 미니원피스. 단아한 원피스에 역동미를 더한, 파도가 일렁이는 듯 굴절되는 스커트 자락이 인상적인 연살구빛 드레스를 비롯하여― 



부드러움과 날카로움, 선명함과 희미함, 진함과 연함 등 색채감이 풍부한 무릎 길이의 스모킹 수트를 비롯해 반투명 비닐로 감싼 원피스, 색종이로 접은 꽃봉오리를 연상케 하는 러플 장식의 톱, 보는 각도에 따라 평면적으로, 또는 입체적으로 다가오는 옷에 이르기까지 컬렉션은 불규칙이 자아내는 균형미를 통해 아름다움과 비율에 대한 새로운 가치를 제시하시면도 웨어러블하다. 왜곡과 굴절의 미학을 절제된 화각 속에 담아내려고 한 디자이너의 고민과 노력이 엿보인다. 



2011년 4월, 데뷔 무대였던 2011-12 F/W 서울컬렉션에서 주변 환경의 밝기에 따라 빛을 내는 '인터렉티브 라이팅'을 접목하여 미래적이고 우주적인 (주변 조도에 따라 전혀 다른 의상으로 변신하는)드레스를 런웨이에 선보인 지 채 3년도 되지 않았지만 디자이너 유혜진은 이처럼 독창적인 실루엣과 디테일, 테일러링으로 패션계에 자신만의 색깔과 차별성을 뚜렷이 드러내고 있다. 


(디자이너 유혜진의 2013-14 F/W Kumann YOO HYE JIN Collection)


오래 전부터 하늘과 우주를 동경했던 사람들의 마음을 아르누보 양식의 장식적 특징을 빌려 우주선이나 비행기, 로켓을 연상케 하는 테일러링과 실루엣으로 재창조한 지난 2013-14 F/W 컬렉션에 이어 이번 2014 S/S 컬렉션 역시 '왜곡과 굴절, 불규칙과 비대칭'이라는 상반된 가치의 균형을 통해 세상이 주는 흥미진진한 선물을 패션으로 선보인 디자이너 유혜진. 신선한 공기를 옷감 속에 불어넣을 줄 아는 디자이너이기에 벌써부터 다음 작품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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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핑구야 날자 2013.11.03 10:32 신고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 댓글

    정말 오랜만에 복귀하셔서 넘 반갑네요..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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